한국산악회 월간회보 "산" 2008년 12월호 - 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11회)
설악행각(雪嶽行脚) (11)
노산 이은상
한계사(寒溪寺)의 폐허(廢墟)
학서암(鶴棲巖)에서 얼마만에 좌편(左便) 기로(岐路)로 들어서니, 언덕 길ㅅ가에 화전민(火田民)의 토옥(土屋) 한 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 주인(主人)은 없고, 개 한 마리가 빈 방 문 앞을 지키고 있는데, 우리를 보고도 멍하니 앉았을뿐이요, 짖고 덤비는 일이 조금도 없습니다.
적막(寂寞)한 산중(山中) 고옥(孤屋) 찾을이 뉘 있으리
어느 벗, 무슨 손님, 도둑인들 있으리오
개조차 지는 천분(天分)을 잊고 그냥 앉았더라.
이것은 참으로 적막한 풍경(風景)입니다. 이 산중에도 군데군데 화전민의 집들이 간혹 있기는 하나, 여기 이 한집처럼 눈물나게 적막한데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무례(無禮)한채로 안을 열고 보매, 조그마한 꿰짝 하나와 빈 사발에 잎숟가락 하나를 걸쳐 둔것뿐이니, 이네 생활을 짐작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엌 솥전에 목저(木箸) 두모가 정답게도 놓인것은 위로(慰勞)되는 풍경이 아니오리까.
마치 ‘인생의 괴로움이 또한 이러하오’하는 대답 같아보입니다.
이 적막한 무주공가(無主空家)를 지나서니, 북편에 웅장하게 솟아앉은 ‘범바위’가 곧 뛰어 내려올듯이, 우리를 향하여 으르릉거리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조그맣게 일쿠어놓은 조밭 한뙈기를 헤치고나니, 우거진 풀 숲 속에 파탑(破塔) 하나가 넘어져있습니다.
이 탑을 보매, 여기가 절 섰던 터인줄을 알겠거니와, 과연 탑기(塔基) 아래를 이리저리 살펴보매, 초석(礎石) 있던 자리와 와전(瓦磚) 조각이 군데군데 흩어져있습니다.
문헌(文獻)을 거(據)하여 보건대, 여기에 섯던 집은 한계사(寒溪寺)이었습니다.
이 한계사라는 절은 지금 이 산중의 주찰(主刹)인 백담사(百潭寺)의 전신(前身)이었는데, 신라(新羅) 진덕왕(眞德王) 원년(元年)(서기 647)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여기에 창건(創建)하고, 미타상(彌陀像)1에 나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산스크리트어 '한량없는 빛'의 뜻)로 '극락'(極樂)이라는 서방(西方) 정토(淨土)를 주재하는 부처.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조하는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어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아미타불'과 장수하게 해주는 존재인 '무량수불(無量壽佛)'(산스크리트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같은 뜻으로 상호교환되어 사용하기도 한다."> 삼위(三位)를 봉안(奉安)한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신라 신문왕(神文王) 10년(서기 690)에 재(災)하고, 다시 그로부터 30년 후 성덕왕(聖德王) 18년(서기 719)에 중건(重建)하였다가, 또 그로부터 70년 후 원성왕(元聖王) 원년(서기 785)에 재(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 5년에 사승(寺僧) 종연(宗演), 광학(廣學), 각동(覺洞), 영조(靈照), 법찰(法察), 설흡(雪洽) 등(等)이 이 기지(基地)를 떠나, 여기서 30리 되는 곳에 새로이 절을 세우고, 운흥사(雲興寺)라 개명(改名)하였으니, 그 운흥사도 지금은 구허(舊墟)만이 우리가 지나온 연현(淵峴)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한계사의 약사(略史)어니와, 폐기(廢基)를 보아서도, 초창(初創) 당시(當時)의 그 대찰(大刹)이었던 풍도(風度)를 짐작하겠습니다.
폐허(廢墟)에 서서 사면(四面) 경관(景觀)을 둘러보매, 비록 산수(山水) 보는 눈을 가졌다 할수 없는 나로서도, 여기에 사기(寺基)를 잡았던 것이 과연 잘 본 일이라 하겠습니다.
뒤에는 ‘범바위’와 아울러 장쾌(壯快)한 삼봉(三峰)이 열립(列立)하고, 앞으로 서동(西東)변(邊)에는 ‘주걱봉’이 마주 보이고, 밑으로 한계(寒溪)를 건너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위에 자란것이,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앉은 것 같다 하여, ‘양반바위’라 하는 것은 명물(名物) 아니랄 수 없는 기관(奇觀)인데, 그걸 동곡(洞谷) 중복(中腹)에 혼자 뾰족한 ‘송곳봉’은 제대로 따로 생겨나, 남과 안 섞이려는 얄궂은 성격(性格)의 일면(一面)을 보이고 있어서, 눈의 각도(角度)를 조금씩 달리할ㅅ적마다 제각기 다른 취미(趣味)를 받게 함을 알겠습니다.
더구나 멀리 우적동(牛跡洞) 숲 위로 넘어가는 저녁 해ㅅ빛이 파탑을 비추어 여인(旅人)의 얼굴 위에 쓸쓸한 그림자를 던지는 지금, 창태(蒼苔) 끼인 기와 조각 위에 낙엽이 쌓이고 덮여, 그 남긴 자취마저 묻어버리려하는것은 여인(旅人)으로 하여금 무한(無限)한 감개(感慨)와 함께 부질없는 눈물을 흘리게 함이 아니오리까.
나그네 석양(夕陽) 길에 한계사(寒溪寺) 찾아 드니
절도 주인(主人)도 없고 바람 부는 빈 터인데
깨어진 옛 탑(塔)이 마저 풀숲 속에 묻혔더라.
흩어진 기와 쪼각 비 맞고 흙이 묻어
이끼로 덮인 것이 돌 속에 들었는데
지는 잎 그 위에 떨려 다시 한겹 가리나니.2
우리는 폐허의 가시덤불 언덕을 헤치고서 대승폭동(大勝瀑洞) 시내로 빠져내려, 계류(溪流)를 거슬러 오르니, 다시 한번 장엄(莊嚴)한 연폭(連瀑)이 동곡(洞谷)을 가로 막아 떨어집니다. 사중폭(四重瀑)이라고 부르는데, 폭포(瀑布)의 사중(四重)임을 이른 것입니다.
이 폭포를 돌아 올라, 오십(五十)층대(層臺)를 기어 오르면, 이곳에 제일 유명한 대승폭(大勝瀑)이 있습니다마는, 길이 너무 험(險)할뿐 아니라, 대승폭 구경은 내일 아침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사중폭만 보고, 우리가 잘 곳인 자양전(紫陽田)으로 향합니다.
대승폭동을 내려 한계 본류(本流)로 나오니, 해는 이미 꺼지고, 황혼 속에 흐르는 물 소리만 더욱 찹니다.
동(東)으로 ‘상투봉’ 위에 달이 둥실 솟아올라, 여인(旅人)의 오늘밤 잠짜리를 또 한번 불안(不安)하게 하려합니다.
나는 문득 불우(不遇)한 방랑객(放浪客) 매월당(梅月堂)의 한계시(寒溪詩)를 읊으며 갑니다.
명인한계수(鳴咽寒溪水) 공산일야류(空山日夜流)
불능수준우(不能隨俊又) 차가임우휴(且可任優休)
지피운아정(地僻雲牙淨) 담청석발유(潭淸石髮柔)
몽혼귀미득(夢魂歸未得) 표전실감수(飄轉實堪愁)3
우리는 자양전에 이르러, 한 촌사(村舍)에서 오늘밤을 쉴것입니다.
그러나 벼갯가에 흐르는 찬물 소리에 잠이 들지 못하고, 창(窓)을 여니, 달이 제 혼자 밝았습니다.
애악계성동객정(呃喔鷄聲動客情) 추풍여관몽난성(秋風旅館夢難成)4
개문망견산천색(開門望見山川色) 월상동천만학명(月上東天萬壑明)5
미곡(美谷)6은 어느 곳서 이 시를 읊었든지, 나는 그대로 오늘밤 내 노래를 대신하여 읊었습니다.
대승폭(大勝瀑)의 기우특관(奇又特觀)
자양전 하룻밤을 잔듯만듯, 달과 물 소리로 더불어 세이고서, 아침 일찍이 ‘부디 평안히 가시요’하는 숙사(宿舍) 촌로(村老)의 다정한 인사에 두 번 세 번 답례를 하고, 일행을 서로 부르며, 바삐 서둘러 대승폭을 향하여 좌편 발길로 쫓긴듯이 달리는, 10월 4일의 오전 8시.
이 자양전에서 한계를 끼고 그냥 그대로 가면, 일명 한계령(寒溪嶺)이라는 오색령(五色嶺)을 넘어 약수(藥水)로 유명한 오색동(五色洞)이 있습니다마는, 시일(時日)의 여유가 없으므로, 오색약수를 마시지 못함이 유감(遺憾)이라면 유감이겠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진계(塵界)의 다병자(多病者)에게는 하필 오색동수(五色洞水)만이 약수이리까. 이러한 신산(神山) 영구(靈區)에 와서야, 아무데서 흐르는 물이든지 그대로 약수이려니 하고 생각됩니다.
대승폭의 웅려(雄麗)한 광경을 어서 보려는이의 발걸음은, 이렇게 바빠본적이 전에도 있었든가 할만큼 이리도 바쁘건만, 둘 밖에 더 못 가진 사람의 다리는 마음의 무리한 제의(提議)를 수월히 들어줄 것 같지 아니합니다.
길은 점점 급한 각도를 지어 오르게만 되고, 이슬에, 젖은 낙엽은 될수있는대로 미끄럽기만 하자 듭니다.
풀잎 꽃잎에 은구슬로 맺혔을 때의 그 아름답던 이슬도, 이러한 때에는 다시없이 그 심술(心術)이 사나워지는가 하매, 무엇인지 공연히도 무정한 생각이 가슴에 서립니다.
그런채로 나는 더욱 용기를 배가하여, 높고 미끄러운 이 길을 정복하려합니다. 얼마 아니하여 엉성드뭇한 삼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얼른 보매, 착낙(錯落)하게 패열(敗列)한 품이 미관일것은 없는 삼림이언만, 한참만에 중로(中路) 암상(岩上)에 올라 바랑(鉢襄)을 멘양 비껴 앉아, 환위(環圍)를 둘러보매, 따로 따로 떨어진 것이 그대로 어깨를 서로 걸쳐, 짓자지않은, 연락(聯絡)이 제게 있고, 어지러이 쉬인것이 또 그대로 이웃과 더불어서 억지 없는 균정(均整)을 스스로 얻었음이 도리어 눈을 끄는 임경(林景)입니다.
그러나 이 중로 암상에 올라서는 무엇무엇보다도 남(南)으로 가리봉(加里峰) 연산(連山) 원수(遠峀)를 바라보는 것이 ‘경지최(景之最)’라 하겠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미타(彌陀) : 정토종 근본 경전의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 [본문으로]
- 이 시중 마지막 2연을 ‘노산산행기’(이은상저, 한국산악문고 1편, 한국산악회 1975년11월 발행) p.85~p.86에서 “이끼로 깔인 것을 / 지는잎 또 덮이네 / 구트나 뒤지지 말자 / 휘파람 불며 내리리라.”로 쓰고 있다. [본문으로]
- ‘노산산행기’(상동. p.86~87)에 이시의 1연과 4연만 인용하였다. ; “목메어 우는 ‘한계’물아 / 빈 산에서 밤낮 흐르나 // 꿈 속에도 돌아 못 가고 / 떠도는 이 심정 시름에 찼네” [본문으로]
- “꼬끼오 닭소리가 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 가을 바람이 여관(旅館)에서 꿈을 이루지 못하네” [본문으로]
- ‘노산산행기’(상동. p.87)에서 2연을 “문 열고 산천을 바라보니 / 동천에 달이 솟아 온 산이 밝네.”로 기록하였다. [본문으로]
- 조선 영조 때 시인 미곡(美谷) 박수증(朴壽徵) - ‘노산산행기’(상동. p.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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