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산악회 월간회보 “산”(2009년 2월,3월호 합본) - 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13회)
설악행각(雪嶽行脚) (13)
노산 이은상
대승령(大勝嶺) 넘어 조추(槽湫)1)까지
탁목조(啄木鳥)의 소리도 점점 멀어집니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적막(寂寞)’보다도 탁목조의 나무 쪼는 소리를 멀리 듣는 ‘적막’이 더 적막한 ‘적막’입니다.
영로(嶺路)로 향한 길은 무한(無限)한 길입니다. 조기요 조기언마는, 가도 가도 그대로 조기인 끝없이 오르는 길입니다.
좌우에 울림(鬱林)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좁디좁은 산로(山路)인데, 로방(路傍)에는 산작약(山芍藥), 당귀(當歸) 등 약초(藥草)들이 있어서 그것 저것 보는 곁에 발걸음의 괴로움을 잊을수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폭포를 떠난지 1시간만에 영상(嶺上)의 시원을 맛보게 되니, 이 령은 대승령입니다.
가슴에 가득하였던 숨참 ‘답답’이 한숨 몇 번에 상쾌(爽快) 무상(無上)한 ‘시원’으로 변하는 맛은 진실로 인종자(忍從者)만이 가질수 있는 특전(特典)이겠습니다.
영상(嶺上)에 올라, 잠깐 동안 눈을 감고 헐떡이던 숨을 진정(鎭定)하거니와, 선문(禪文)의 소위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식무천(內息無喘)’2)이란 것도 곧 이것을 이름이 아니든지요.
소헐(少歇)3)에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내설악(內雪嶽) 동천(洞天)을 요망(遙望)4)하면서 영로(嶺路)를 내립니다.
이쪽으로 내리는 영로(嶺路)는 저쪽으로 오르던 영로(嶺路)와는 별취(別趣)의 감(感)을 줍니다. 그것은 다같은 송백림(松栢林)이면서도, 이쪽으로는 수백(數百)척(尺)으로 산(算)할자들이요, 더욱이 장관(壯觀)은 60여척 되는 단풍(丹楓)입니다. 40척 가량 그 아래로는 일지반엽(一枝半葉)이 없고, 오직 그 위에서만 하늘을 덮어 피었음은, 마치 천옹(天翁)의 화원(花園) 밑을 지나가는 감(感)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중에 처음부터 동반(同伴)이 되어있는 포수는 아직까지 전쟁(戰爭) 못치른 병정(兵丁) 모양으로 겁(怯)은 겁대로 나련마는, 나뭇잎만 부시럭해도 ‘이크’하고 ‘받들어총’을 할 지경입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짐승이 많다 할뿐더러, 권소유(權少遊)의 고기(古記)에도 바로 이 지점(地點)에서
“초수몽밀(草樹蒙密), 앙불견천(仰不見天), 풍취엽동(風吹葉動), 첩상경(輒相驚), 왈호과야(曰虎過也), 연경무호(然竟無虎)”5)
라 한것을 보면, 아마 그도 우리 모양으로 나뭇잎 부시럭하는 소리에 무던히도 놀랐던 모양입니다.
끝내 아무런 접전(接戰)이 없이, 50분(分) 허(許)에 계곡(谿谷)의 청류(淸流)를 만나게 되어, 한참 갈(渴)하였던 목을 넉넉히 추김은, 사막(沙漠) 아닌 이 산중(山中)에서 오아시스의 법열(法悅) 향연(饗宴)을 성대(盛大)히 차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시내를 건너서, 다시 화전(火田) 길을 끼고 내리기 한 10분 허(許)에 단애(斷崖) 횡병(橫屛)이 천장(千丈)으로 높이 둘렀는데, 일반(一半)은 토화(土花)로 푸르렀고, 일반은 상엽(霜葉)으로 붉은 것이 두 눈만 가지고는 감상(鑑賞)하기에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애전(崖前)에는 광대(廣大)한 반석이 있어, 자추(紫皺) 창점(蒼點)6)이 다시 한번 사람의 눈을 희롱(戱弄)하는데, 이 큰 반석 길이 큰 단애 밑 그 사이로 흐르고 떨어지는 간류(澗流)는 마치 ‘말구유’와 같습니다.
과연 그 이름도 ‘구유소’라 부르거니와, 권기(權記)에 적힌
“간류협이심(澗流狹而深), 여마조(如馬槽), 도주율율(跳珠汩汩), 명조추운(名槽楸云)”7)
이라 한것이 이것인줄 알겠습니다.
‘구유소’라 하니, 무론(毋論) 이 선산(仙山)에서야 천마(天馬) 밖에 먹일 것이 없을것인데, 전일(前日)에 먹였던 자리인지, 지금도 먹이는 중인지, 후일(後日)에 먹일것인지, 우리 속안으로서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인간에 있는 말로 치면 일렬(一列)로 3,40필(匹)은 먹임직하나, 천마로는 1필 밖에 더 못 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마(天馬)의 만리(萬里) 행공(行空) 이 산 위를 지날적에
예 내려 이 영수(領水)를 마시고 가옵더니
사람이 이곳을 일러 구유소라 이르더라.
무형(無形)한 천마이매 속안(俗眼)이 못 보오나
지금도 이 산위를 행여 아니 지나는지
이따금 솔바람 소리에 고개 절로 들려라.
자산(玆山)8) 주찰(主刹) 백담사(百潭寺)
천길 돌벼래를 단풍으로 입혔는데
곁에 선 나무조차 제 이름 다 버리고
못 붉어 누를찌라도 단풍인체 하려더라.
단풍은 붉으라하라 타듯이 붉으라하라
너희는 너희대로 황금(黃金) 빛이 제 자랑을
섞이어 어울린 곳에 경이 더욱 좋으니라.
조추(槽湫) 단애(斷崖)에 하도 단풍(丹楓)이 좋고 하도 황엽이 많아, 수장가(數章歌)를 부르면서 떠나갑니다.
개울 바닥을 뛰고 근느며, 언덕받이를 기고 오르는 동안, 아름다운 자연을 향한 경탄(警嘆), 예배(禮拜)의 마음은 그 도(度)가 더 높아가고 더 강(强)해갈뿐입니다.
이리하여 3,40분(分)여만에 큰 내를 가로 만나니, 이것은 백담동수(百潭洞水)입니다.
여기서 우편(右便) 서(西)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시(永矢), 오세사(五歲寺) 암자(庵子)로 가는 길이요, 좌편(左便) 동(東)으로 물을 따라 내려가면 백담사가 됩니다.
우리는 우선 이 후자(後者)를 택(擇)하여 오늘밤을 백담사에서 쉬고, 내일 다시 이리로 거쳐 내산(內山) 진경(珍景)을 차례차례 볼것입니다.
백담사까지 가는 동안, 계곡의 벽수(碧水) 청석(靑石)은 그 취(趣)가 지나온 다른데와는 자별(自別)한자라 하겠거니와, 그 소려(昭麗)한 품으로는 금강(金剛)의 장안동구(長安洞口)와 같다 하겠고, 그 청기(淸奇)한 질(質)로는 서산(西山)의 향로동부(香爐洞府)와 비기겠습니다.
석양(夕陽)입니다. 백담사의 저녁 염불(念佛)을 재촉하는 석양입니다.
이 백담사의 역사에 관하여는 앞서 한계사(寒溪寺) 구허(舊墟)를 지나오며 말씀한바도 있었거니와, 최초의 전신(前身)으로 말하면, 신라(新羅) 자장율사(慈裝律師)의 창건(創建)인 한계사요, 그것이 라말(羅末)에 연현(淵峴)에 자리를 잡았던 운흥사(雲興寺)가 되었다가, 그것마저 고려(高麗) 성종(成宗) 3년(서기 984)에 8인(人)의 변(變)을 입어 없어지고서, 후(後) 3년에 동훈(東薰), 준희(俊熙) 등(等)이 고기(古基)의 북(北) 60리(里)지(地)에 이건(移建)하고, 심원사(深源寺)라 개명(改名)하였습니다.
그 심원사가 우리 세종(世宗) 14년(서기 1431)에 또 다시 재(災)하고, 후 2년에 해섬(海暹), 취웅(翠雄) 등이 동하(洞下) 30리(里)지(地)에 중건(重建)하고, 선귀사(旋龜寺)라 하였다가, 후 9년에 또 재(災)하고, 후 4년에 고지(古址)의 서(西) 1리(里)허지(許地)에 영취사(靈鷲寺)가 되었더니, 세조(世祖) 원년(서기 1456)에 그것마저 회연(囘緣)을 이으니, 명년(明年)에 사승(寺僧)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 등이 고지(古址)의 상류(上流) 20리(里)지(地)에 중건하고, 백담사라 시명(始名)하였습니다.
이렇게 백담사의 명칭을 얻은 후에도 또한 그 변천(變遷)이 적지 아니하여, 영조(英祖) 48년(서기 1772년)에 우(又) 재(災)하매, 후 3년에 최붕(最鵬), 태현(太賢) 등이 절을 중건하는 동시에 다시 심원사(尋源寺)라 개칭(改稱)하였다가, 정조(正祖) 7년(서기 1783년)에 이르러 또 다시 백담사라 고쳐 불렀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난 을묘(乙卯)년(서기 1915년)에 백담사의 160여(餘) 간(間)이 한회(寒灰)로 변하고, 지금 있는 이 집은 후 4년, 근자(近者)에 지금 이 산중 오세암(五歲菴)에 거하는 인공노탄(印空老憚)9)이 중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건봉(乾鳳)10)의 속찰(屬刹)인채로 자산(玆山)에서는 주찰(主刹)이언마는, 창연(蒼然)한 고색(古色) 없음이 오히려 사원(寺院)의 제 격(格) 아닌지라, 호고(好古) 행인(行人)의 입맛에는 못마땅한 점(點)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75간(間)의 대규모(大規模)임에는 놀람직하고, 오히려 그보다는 법당(法堂)에 걸려있는 자장(慈藏)의 유물(遺物) 소종(小鐘) 1좌(坐)와, 또한 인조(仁祖) 10년(서기 1632년)에 상(上)으로부터 당시 사승(寺僧) 설정(雪淨)대사(大師)에게 하사(下賜)하신 칠층 소형 옥탑(玉塔) 1좌(坐)가 사보(寺寶)로 남아있음을 반가이 여깁니다.
이사(移徙)도 많이 하고 개명(改名)도 많이 하기로 아마 이 백담사만한 내력(來歷)을 가진 사원은 역내(域內)에 다시 없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래 결국 앉은 자리가 여기인가 하고 둘러보매, 이 산중에서는 가장 빠지는 위치이겠음을 더욱 탄(嘆)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修道)가 반드시 산수(山水) 위치(位置)의 호불호(好不好)에 절대로 매인것이 아닐것이라면, 다만 이곳 청년 승려(僧侶)가 소위 ‘결절(決切)’ 2자(字)의 지극한 공부로 말미암아 산수마저 더 빛날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선방(禪房) 한 구석에 목침을 베고 누워, 황량(黃粱) 1취(炊)11)의 동안이나마 수(睡)삼매(三昧)를 재촉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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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주
1) 구유소
2) 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 ?∼528) 대사의 <소실육문(少室六門)>에 있는 법문으로 ‘노산산행기’(상동, p.98)에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고, 안으로 헐떡임이 없게 하라.’으로 쓰여 있다.
3) 잠깐 휴식
4) 멀리 바라보다.
5) ‘풀나무가 우거져서 우러러도 하늘을 볼 수 없는데 바람이 불어 잎사귀만 부스럭해도 문득 서로 놀라며 “범이다”하고 말 하지만 범은 끝네 없었다.’ - ‘노산산행기’(상동, p.99)
6) 자추(紫皺) 창점(蒼點) : 자주 주름, 푸른 점. ‘노산산행기’(상동, p.100)에는 ‘붉은 무늬 푸른 점’으로 썼다.
7) ‘시냇물이 좁고 깊어 마치 말구유와 같아 이름하되 구유소라 한다.’ - ‘노산산행기’(상동, p.100)
8) 자산(玆山) : 자(玆)는 ‘이 곳‘의 뜻. 즉, ’이 산‘(설악산)을 말함
9) ‘노산산행기’(상동, p.104)에는 ‘인공 노선(印空 老禪)’으로 쓰여있다.
10) 건봉사((乾鳳寺)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에 있는 절. 6·25전쟁 이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로 총 642칸의 큰절이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11) ‘황량’은 ‘누런색의 기장쌀’. 즉 불을 때어 기장밥을 짓는 동안의 시간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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