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악회 회보 '산' (2009년 9월호) - 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19회)
설악행각(雪嶽行脚) (19)
노산 이은상
가야동(伽倻洞)의 신보유(信步遊)
유혹(誘惑)의 매연(煤煙)에 끄을어 희미해질뻔한 내 정결(貞潔)의 거울을 이 청봉(靑峰)1) 위에 올라 다시금 번쩍하게 밝혔습니다. (략(略))
낙망(落望)의 광풍(狂風)에 가물거려 꺼질뻔한 내 정열(情熱)의 횃불을 이 청봉 위에 올라 다시금 힘차게 태웠습니다. 대한사람으로 하여 달려나가는 길에 무슨 험난(險難)이 있나 없나를 이 횃불로 뒤져, 인제 주저없이 갈것입니다.
지금 내눈앞에 보이는 모든 봉만(峰巒) ― 저속에 들어있어 오늘쯤은 무슨 일로 서로 다투나! 시기(猜忌)하나! 훼욕(毁辱)하나! 음모(陰謀)하나! 유인(誘引)에 전도(顚倒)되는지, 현실의 고통은 얼마나한지, 영혼의 번뇌는 어떠한지 하고 생각나는 내 형제와 내 자매(姉妹)들 ―
그러나 가슴 미어지는 쓰린 생각을 이 새로운 힘과 용기로 다 물리쳐버릴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이 청봉을 내리매, 고작 엄숙(嚴肅)한 그대로, 한껏 침묵(沈黙)한채, 스스로 내 걸음, 걸음 속에서 그 무슨 ‘광명(光明)을 향한 신조(信條)’를 분명히 찾을 수 있음이, 남은 몰라도 나 스스로만은 어쩐지 든든한 웃음이 마음 속에 퍼짐을 알겠습니다.2)
이리하여 우리는 단숨에 이 청봉을 내렸습니다.
다시 봉정암을 지나면서 시원한 샘물을 얻어마시고, 이번엔 사리탑(舍利塔)이 서있는 석가봉(釋迦峰) 거암(巨岩) 밑 길로 하여 우편(右便) 동곡(洞谷)을 뚫어갑니다.
소허(少許)에 장경암(藏經岩)을 만나 암하(岩下)로 지나가게 되는데, 이 장경암이란 것은 금강산에도 있습니다마는, 여기 이것이 아마 10배(倍)는 더 크겠습니다.
말하자면, 살타파륜보살(薩陀波倫菩薩)이 금강산으로 지고 들어갔던 장경(藏經)은 천권(千券)쯤에 불과하였고, 여기에는 누구가 가져다놓은 것인지 문자 그대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서 한권도 빠침 없이 다 가져다놓은 것이라 할만합니다.
더욱이 큰 동곡을 가운데 놓고 장경암에서 건너보는 대안(對岸)에 6,7봉의 삭발(削拔)한 거암들이 있는데, 이것을 불러 노선봉(老禪峰), 상좌봉(上座峰), 향탑봉(香榻峰) 등이라 부릅니다.
아마 저 노선(老禪)이 젊었을 때, 이 수만(數萬) 장경(藏經)을 다 읽고, 지금은 책은 여기다 쌓아놓고 따로 건너편에 떨어져 앉아, 명목(暝目) 참선(參禪)만 하는 모양입니다.
이 ‘장경바윗골’을 1시간쯤 걸려 내려가면, 우편으로 와룡단(臥龍湍)3)연이라 부르는 반석(盤石) 길과 좌편(左便)으로 가야동(伽倻洞)으로 들어가는 분류(噴流)가 서로 합수(合水)되는 곳을 만납니다.
우리는 와룡단 길을 두고 좌로(左路)로 내려가다가, 구비를 틀어 가야동으로 들어섭니다.
이 설악을 왜 분류격단(噴流激湍), 위암험로(危岩險路)라고만 하겠습니까. 여기 이곳은 따로이 ‘잔잔한 벽계수(碧溪水)’를 이루어 반석 위에 깔린 물이 흐르는지 머무는지를 분간(分揀)하기 미처 어렵습니다.
수록산무압(水綠山無壓) 산청수자친(山靑水自親)
호연산수리(浩然山水裡) 래왕일한인(來往一閑人)4)
이러한 고구(古句)를 외우면서, 나도 또한 가는지 오는지 신보(信步) 유상(遊賞)하는 맛은 참으로 좋습니다.
더욱이 가야동 중의 대표적 명물인 천왕문(天王門)이란 석벽(石壁) 안과, 그 속에 숨어 떨어지는 천왕폭(天王瀑)의 절경은 그대로 천계(天界)의 일구(一區)를 소요(逍遙)함 같은 생각이 나게 합니다.
무론(毋論) 천왕문이니 천왕폭이니 하는 이름은 우리 고교(古敎)로부터 남아 끼친 일(一) 영장(靈場)의 표시(表示)이겠거니와, 과연 가야동이란 이름은 누구가 지었는지? ‘옳거든! 옳거든’하는 감탄을 연발하도록, 이렇게 맞을수가 있겠습니까. 참 옳거든요!
가야동(伽倻洞) 가야고를 타는이 긔 뉘신고
청아(淸雅)한 저 소리를 듣는이 긔 뉘신고
타는이 천녀(天女)이온데 내가 있어 듣노라.
궁상(宮商) 각치우(角徵羽)를 고로고로 짚으올쩨
소리도 갖을러니 손 더 아니 고우신가
취(醉)하여 듣거니 해 지는줄 몰라라.5)
오세암(五歲庵)의 암호변(庵號辯)
우리가 오세암(五歲菴)에 이를 때는 황혼(黃昏)입니다. 이 오세암의 고명(古名)은 관음암(觀音菴)으로서, 신라 선덕왕대(善德王代)에 자산(玆山) 최고(最古)의 연승(緣僧) 자장율사(慈裝律師)의 손으로 초창(初創)된 것입니다.
그리하였다가, 이씨조 인조 21년(서기 1643년)에 설정선사(雪淨禪師)가 이 관음암을 중건(重建)하고, 오세암이라 개칭(改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세(五歲)’라고 개칭하게 된 연유(緣由)에 관하여 무진자(無盡子)의 사적기(事蹟記)에 이러한 전설을 써둔 것이 있습니다.
『고려 때에 설정조사(雪頂祖師)란 명승(名僧)이 있었는데, 이 암자(菴子)를 중수(重修)하고, 세발(洗鉢)한지 이미 오래였더라. 그에게는 다섯 살 먹는 질아(侄兒)가 있어,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여기 와 우거(寓居)하더니라. 동(冬) 10월달이었다. 사(師)가 영동(嶺東)에 무슨 일이 있어, 질아에게 부촉(付囑)하기를, 너는 꼭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심념(心念)하면서 밥을 먹고 오늘밤을 자라. 그러면 내가 내일이면 돌아오마 하고, 령(嶺)을 넘어 갔었더라. 이 밤에 눈이 퍼내려 산과 같이 쌓인지라, 영로(嶺路)가 불통(不通)하게 되매, 돌아오려는 그를 여러 중들이 만집(挽執)하여, 할수없이 사는 돌아오지 못하였더라. 그해 겨울이 지나 해춘(解春)한 뒤에, 사(師)가 돌아오매, 죽은줄만 알았던 질아가 방에서 관세음을 부르고 있다. 놀라며 어찌된지를 물으니, 질아가 답하되, 자모(慈母)가 늘 와서 젖도 먹이고 밥도 먹이더이다 하더니, 얼마뒤에 과연 한 젊은 백의부인(白衣夫人)이 관음봉으로서 내려와, 동자(童子)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이어 보리기(菩提記)를 주고서는, 청조(靑鳥)로 화(化)하여 가더라. 그래 오세(五歲) 동자(童子)가 견성득도(見性得道)하였다하여, 이곳을 동국(東國) 제일(第一) 선원(禪院)이라 하니라』
이것으로 보면, 이 암명(菴名)의 ‘오세’는 여기 말한 오세 동자로 말미암아 된것 같이 되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우선 이 전설(傳說)만 비평(批評)한다 할찌라도, 설정조사가 질아의 죽을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기 생명이 눈속에 위태하다 하여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것은 불교의 자비한 교의(敎義)를 도로혀 크게 상(傷)함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 전설을 지어낸 작자의 어리석음을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그러하려니와, 이 오세 문제(問題)에 있어서, 나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號)를 잉용(仍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찍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손위(遜位)하시자, 그 충절(忠節)을 참기 어려워, 개걸(丐乞)의 광시인(狂詩人)이 되어, 역내(域內)를 주유(周遊)하던 매월당이 그의 문집(文集) 본전(本傳)에도 명기(明記)한바와 같이, 양양(襄陽), 강릉(江陵)경(境)에 놀기를 좋아하였고, 설악, 한계(寒溪), 청평(淸平)6) 등 산에 다주(多住)하였던 것으로, 특히 이 관음암에 구류(久留)하였던 것이라, 그의 ‘오세(五歲) 신동(神童)’이라 한 별호(別號)로써 암명(菴名)을 개칭하게 된것일 것입니다.
학암당(鶴岩堂)의 경각중건기(經閣重建記)를 거(據)하면,
오세지칭(五歲之稱), 혹운오세신동견성지지(或云五歲神童見性之地), 위오세(爲五歲), 이안견제산조사소록(而按見諸山祖師所錄), 과유오세조사운(果有五歲祖師云), 즉기설역가징(則其說亦可徵), 혹운매월선생서심어차(或云梅月先生棲心於此), 상칭오세신동(甞稱五歲神童), 고인호오세(故因號五歲), 양설단무문헌(兩說但無文獻), 미상숙시야(未詳熟是也)7)
라 하였으니, 이것은 고려 오세 동자로 말미암아 된것인지, 매월당 오세 신동으로 말미암아 된것인지, 암호(庵號)의 개칭 유래를 단정하기 어렵다 한 말입니다마는, 무론 문헌의 기록이 없는만큼, 어느것으로 천단(擅斷)하기는 어렵다 함이 가(可)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가지의 사실로 매월당의 ‘오세’를 인정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첫째 소위 견성득도(見性得道)했다는 운정(雲頂)의 오세 질아는 전설이요, 매월당의 오세는 사실이므로 보아, 사실의 편을 승(勝)하게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만일 고려 오세아(兒)의 설이 옳다고 한다면, 진작 매월당이 이 절에 오기 전에 암호가 개칭되었을 것인데, 암호가 개칭되기를 매월당이 사세(辭世)한지도 1백 5십년이나 지난 다음, 인조(仁祖)시에 된것임을 보아서 매월의 호를 잉칭(仍稱)한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동여도(東輿圖) 13책 설악산 부분. 백담사, 심적사, 봉정암, 신흥사, 보문암, 화엄사 등의 절과 한계령 서북쪽에 한계산을 신흥사 서쪽에 설악산을 표기하고 있다.(동여도는 보물 제1358호로 조선 철종·고종 연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이다.) [사진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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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뫼’ - ‘노산산행기’(이은상저, 한국산악문고 1편, 한국산악회 1975년11월 발행) p.143
2) ‘노산산행기’(상동) p.144에는 이 문장 다음에 “이 것이 내 머리 위에 내린 민족의 세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청봉에 올라 서니/ 샘처럼 기운이 솟네/ 이 힘 가지고/ 내 갈 길 가야겠네/ 민족의 세례를 받고/ 새 몸 되어 내립니다.”를 수록하였다.
3) ‘와룡 여흘’ - ‘노산산행기’(상동) p.146. 단(湍)은 물이 빠르게 흐르거나 소용돌이 치는 ‘여울’의 뜻.
4) “물이 푸르니 산이 좋아라네/ 산이 푸르니 물도 좋아라네/ 시원도 할사 산수 속으로/ 한가론 한 사람 오고 가네” - ‘노산산행기’(상동)
5) ‘노산산행기’(상동) p.147에는 이 시를 “꿈같은 풍경 속에서/ 신비한 곡조 들리시네/ 소리나는 그림이라면/ 아마 내 말을 웃으리마는/ 남이사 믿거나 말거나/ 나는 내 눈으로 보고 간다네”로 씀.
6) 현재 춘천의 오봉산(785m)를 말함. 옛이름은 경운산, 경수산.
7) “오세의 일컬음이 혹은 오세신동의 견성한 곳이라 해서 오세라고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절 조사(祖師) 스님들의 기록을 보면 과연 ‘오세조사’란 이가 있기는 했으나 혹시 사실일 수도 있겠고, 또 혹은 말하되 매월당 선생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는데 일찍이 그를 일러 ‘오세신동’이라고 일컬어 왔던 것이므로 이 곳을 ‘오세’라고 했다는 것인 바 두 가지 말이 모두 문헌에는 없는 것인즉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않다” - ‘노산산행기’(상동)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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